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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 황욱 선생 생애와 작품세계
'꿈틀꿈틀 생동하는 살아 움직이는 산맥'
 
이승희 기자 기사입력  2015/12/02 [10:23]

 

동양 사람들은 예로부터 글씨와 글쓰기를 숭상했다. 사람을 판단할 때도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해서 사람의 언행과 함께 글씨의 바름을 중요시 했다.

한국의 서예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그 긴 세월만큼 한국 서예사에는 놀라운 필력(筆力)과 운필의 경지를 터득한 숱한 명필들이 존재했다. 신라시대 ‘필신(筆神)’이라 불리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의 한석봉, 안평대군, 김정희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제각기 독창적이면서도 신묘한 경지를 이루며 한국 서예의 저력을 과시한 인걸들이다.

우리 고장이 배태한 故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도 그 계보의 뒤를 이을 명필이다. 석전은 이러한 거장들의 예술정신과 서법을 본받아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했다. 그로써 한국서예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근대를 대표하는 서예가다. 

◆ 기운생동(氣韻生動)하는 필력 넘쳐

석전의 글씨는 살아 움직이는 산맥이다. 그것도 꿈틀꿈틀 기운생동하는 거대한 산맥이다. 그의 글씨를 보노라면 백두산에서 한라산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백두대간 앞에 서있음을 느낀다.

뼈만 추려 놓은 것 같은 그 산줄기 사이로 금강산 구룡폭포의 굉음이 들려온다. 또 수만년을 숨쉬어온 모악산 기암괴석 사이에 뿌리박은 노송(老松)을 스치는 솔바람 소리도 흩날린다. 석전의 글씨가 주는 신비로운 힘이다.

그는 한국서예 역사상 최초로 ‘(좌수)악필(握筆)’이라는 독특한 서체의 경지를 이룩했다. 그 서법은 정통을 넘어선 혁명과 같은 운필법이다.

가히 한국 서예의 새 장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지와 식지, 그리고 가운데 손가락으로 붓대를 잡고 쓰는 것이 보통의 운필법이다. 석전은 이와는 달리 붓을 손바닥으로 거머쥐고 꼭지부분을 엄지로 꽉 눌러 붓을 고정시키는 ‘악필’이라는 혁명적 서체를 개발해냈다. 지금까지도 한국 서예 사상 가장 독창적이고 독특한 서체의 하나로 평가받는데 이견이 거의 없다.

사실 ‘악필’은 만고풍상의 세월이 빚어낸 인내와 고통의 산물이다. 석전의 아들 황병근 전북 성균관유교연합회장은 “아버지는 어려운 환경에 처하면 처할수록 남다른 집념과 열정으로 더욱 서예에 몰두하곤 하셨다”고 말했다.

석전 선생의 악필은 단순한 변용이나 응용이 아닌 석전 예술혼의 결정체다. 악필법은 일체의 기교가 배제된 마음과 손이 서로 호응하지 않으면 쓸수 없는 ‘심법(心法)’의 글씨다. 가야금 줄의 팽팽한 긴장과 기백 넘치는 석전체가 그냥 우연히 생겨난 것은 아니다.

석전이 가야금과 소리와 활쏘기에 전념하면서 홀로 정진했던 청장년기 각고의 세월이 밑거름이 된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 가야금과 활쏘기에 전념하면서 홀로 정진했던 청장년기
 
석전의 악필은 이전의 맑고 담담한 분위기와는 달리 삽필(澁筆)의 구사가 두드러지고 약간의 과도기를 거친 뒤 83- 84살에 오른손 악필의 절정을 이루었다. 85살부터는 오른손 악필도 어렵게 되자 87살에 왼손 악필을 시도했다. 왼손악필을 구사했던 10년 동안 그의 서풍은 93살을 기점으로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곧 90살 까지는 자형(字形)이 오른쪽 어깨가 올라가는 일반적인 행서의 흐름을 유지하다가 93살부터는 반대로 오른쪽 어깨가 내려가면서 자간(字間)의 흐름이 달라진다. 그러면서도 묘한 것은전체적으로 통일감과 안정감이 더욱 깊어졌다는 사실이다.

다른 서예가들과 달리 석전은 90살 이후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다시 말해 노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한 기운생동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그의 예술이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인서구로(人書俱老 사람과 글씨는 더불어 늙는다)라는 상식마저 뛰어 넘은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석전은 밖으로 굴곡 많은 한국 근대사의 격랑을 헤치며, 안으로는 자신의 신체적 불운을 딛고 일어선 뜨거운 예술혼의 화신이었다.

원로 서예가 김기승(金基昇)은 “석전의 글씨는 그 경직장엄함이 노송에 영풍이생동(迎風而生動) 하는 것 같고 전아온윤(典雅溫潤)함은 장강(長江)의 임파이유동(任波而流動) 하는 것 같은 서체로써 특히 리듬이 풍요한 여운(餘韻) 여정(餘情)의 글씨 한 자(字) 한 획(劃)에서 백아(伯牙)의 탄금성(彈琴聲)을 듣는듯 하다”고 표현했다.

선비의 한 전범을 보여주며 악필이라는 독특한 서체의 경지를 이룩한 석전(石田) 황욱(黃旭)은
1898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서 태어났다.

황효익의 5남3녀중 2남이었다. 그의 가문은 15대를 내려온 문한세가(文翰世家)로 영조때 실학의 거장인 황윤석(1729-1791)의 종가(宗家) 7대손이다. 

석전은 옛 선비들이 그러하듯 5살 때부터 한학과 서예를 익히며 군자의 덕과 도리를 깨우쳤다. 그러다 1918년 근촌 백관수의 권유로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 신학문을 익힐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유가적 전통을 고집하던 부친의 명으로 자진 중퇴, 고향으로 내려와야 했다. 일본의 가르침을 거부한 아버지의 엄명때문이었다.

이렇듯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서 우국충절(憂國忠節)의 정신을 이어받은 석전은 1920년 일제의 암울한 시대상을 눈뜨고 볼수 없는데다 끓어오르는 열정을 삭이기 위해 처숙(妻叔) 노병권과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그는 꼬박 10년 세월을 금강산 돈도암에 기거하며 도학과 서도에 전념했다. 이때 탄탄한 기초가 닦이고 훗날 당당한 석전체의 원형이 마련되었다 그의 곧고 굳은 정신을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중에 석전이 “곱게 보이려는 글씨 보다는 법필(法筆)을 섭렵하고 정심(正心)으로 써야 하고 욕심 없는 정자(正字)를 많이 써야 그 나름대로 자기의 창작서(創作書)가 된다”고 한 말은 자신이 기본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말해준다.

또한 ‘여추획사 여인인니 (如錐劃沙 如印印泥(송곳을 잡아 모래위에 획을 긋듯 하고 머무를 때는 진흙위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라는 주장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석전은 1930년 고향으로 돌아와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 신위(申緯)를 사숙하며 옛선비들이 갖추어야 할 六藝 (禮·樂·射·御·書·數)를 더 깊숙히 익혔다.

풍진세상의 영욕을 멀리하고 도덕군자의 길을 지키는데 매진했다. 말하자면 석전은 중원의 강호에서 고수들의 도를 터득한 후 한국적인 풍토에 맞는 자신만의 필법을 찾아내 연마를 거듭했다. 이때 석전은 고창과 정읍 등지에서 시주(詩酒)와 활쏘기, 가야금을 즐겼으며 율계회를 결성하여 정악(正樂)을 합동연주하기도 했다. 

◆ 최근 들어 석전 작품세계 관심 높아지면서 새롭게 조명 돼

석전 선생은 63세(1973년)에 오른손 수전증으로 인해 붓을 잡기 어려워지자 손바닥으로 붓을 잡고 엄지로 붓 꼭지로 운필하는 악필법을 개발한다. 전화위복이었다.

묘하게도 새롭게 개발한 악필로 쓴 글씨들은 새 예술세계를 열었다. 마치 역대 서법이나 기교를 초월한 득도의 경지에 이른 듯 했다. 이전의 글씨가 한 마리 고고한 학이 자유로이 노니는 형상이었다면, 악필 글씨는 비상한 기운을 지닌 용(龍)이 힘차게 승천하는 듯한 형상을 띠었다.

이러한 그의 뛰어난 글씨는 친교가 있던 정인보(鄭寅普)·김성수(金性洙) 등으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이로써 석전 서예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까운 이웃의 비문과 선대의 묘비를 썼을 뿐 한 번도 서예가로서 중앙무대를 기웃거리지 않았다. 이는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국전(國展)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초연하게 은자(隱者)로서의 품격을 그대로 지켜 나갔다.

아무리 ‘진흙 속 진주’라고 할지라도 그 빛은 감출 수 없는 법. 마침내 1973년 석전은 전주 유지들의 강권에 못 이겨 회혼기념 서예전을 열게 된다. 그의 나이 일흔 다섯에 가진 첫 전시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동아일보사 주관으로 서울에서 희수 기념 전시회를 개최했다. 당시 전국의 서예가들이 그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모일 정도로 많은 화제를 낳았다.

이후 석전은 매년 서울, 광주, 부산, 전주 등에서 초대전과 회고전을 가지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뿐만 아니라 1988년에는 구례 화엄사의 일주문 현판과 1991년에는 금산사 대적광전 현판휘호를 남겼다. 또 오목대와 한벽루 현판 요월대(邀月臺) 등 다양한 현판에 글씨를 새기며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석전 선생 아들 황병근 전북예총 전 회장은 “6.25 전쟁 이후 두 형들의 일들로 인해 아버지께서 모진 고생을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어려움에 처하면 처할수록 더욱 서예에 전념해 예술혼을 불태웠다”며 “돌아가시기 전까지 붓을 놓지 않고 집안의 모든 마루와 신문지가 새까맣게 될 때까지 글씨를 쓰고 또 쓰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작품들이 최근들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세계서예비엔날레 출품작을 비롯, 개인 소장자들이 석전의 작품을 공개해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석전의 최초 공모작품으로 추정되는 8곡병풍작품을 공개한 선각(先覺)스님 소장 작품(사진)은 애호가들의 관심을 집중키고 있다.

선각스님은 “이 작품을 20여년전 진안군에서 구입했다”며 “전문가의 감정이 재차 이뤄져야 하겠지만 서예관계자로부터 공모전 응모작으로 보인다는 해석을 받았다”고 말했다.




<인터뷰> 선각(先覺)스님



“이달 29일부터 제주도에서 경극 ‘허베이 팡즈’를 공연할 예정입니다. 서민들의 삶의 애환과 사연을 희극적으로 풀어낸 중국판 마당놀이라고나 할까요. 대중예술이 화려하고 풍자적이어서 의외로 많은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선각(先覺)스님(경북 칠곡 황학사 주지)은 불도를 닦는 틈틈이 공연이나 문화운동을 통해 대중들과의 만남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대중 친화적이고 마음이 열린 스님이다.

선각스님은 16일 포교교육원 설립을 위한 부지 물색차 전주를 방문하면서 자신의 종교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불교는 믿음의 종교라기보다는 ‘참나를 찾는’ 화두를 붙들어야 하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나를 깨닫지 못하고는 재물도 배부름도 소용없는 것이죠.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는 인생사 모든 것이 외로움과 번뇌의 연속입니다.”
 
선각스님은 이곳 전주에서 아주 젊었을 적부터 전통문화사랑모임, 대중문화운동, 공연연출기획, 미술관 소극장 운동, 연극, 국악등 문화계 전반에 인연을 안 맺은 곳이 없을 정도로 관심이 넓다.

하여 세계속에 우리 고유의 문화나 전통을 어떻게 널리 알릴까 고민도 여러모로 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스님이 소장하고 있는 800여 품목 그림과 도자기 등을 일반에 공개하는 것이다.

이번에 전주에 들르면서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이 서예가 석전 황욱 선생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스님도 나름대로 감식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면서 훌륭한 작품들을 애호가들에게 널리 선뵈고 작품 감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눴으면 한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여섯 살 때 청화 큰스님으로부터 스님이 될 운명이라는 점지를 받은 선각스님은 출가 이후 구도자로서의 길에 충실하면서도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노력을 해왔다.

끊임없이 사람들과 부대끼고 어울리려고 힘쓴다는 선각스님은 그것이 자신의 숙명이나 다름없다면서 그것이 또한 즐거운 일이라고 말한다.

선각스님의 앞으로 구도자로서 소원이라면 팔만사천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28만대장경으로 간행하는 불사를 해보는 것이다. 어머어마한 작업이겠지만 간절한 발심으로 발원하면 언젠가는 끝을 맺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대서원이다. 

“이 땅위에 모든 생명들이 고통받지 않고 행복하게 웃는 그런 세상을 주변 이웃들에게서부터 만들어가는 것이 수행자로서의 기본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수행자 뿐만 아니라 모두가 힘쓴다면 더욱 빨리 그런 따뜻한 세상이 이뤄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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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2/02 [10:23]  최종편집: ⓒ jbbrea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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